판매가 | 350,000원 |
---|---|
배송방법 | 택배 |
배송비 | 3,500원 (100,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) |
적립금 |
|
재고 수량 | 1개 |
결제수단 | 무통장 입금 |
SNS 상품홍보 | ![]() ![]() |
---|
![]() |
(최소주문수량 1개 이상 / 최대주문수량 1개 이하)
사이즈 가이드엘피판 상태는 아래에 상품상세 정보를 참고하세요.
위 옵션선택 박스를 선택하시면 아래에 상품이 추가됩니다.
상품명 | 상품수 | 가격 |
---|---|---|
성재 김태석(金台錫)와당문 2절지 |
![]() ![]() |
350000 ( |
총 상품금액(수량) : 0 (0개) |
성재 김태석 와당문 입니다
서예크기: 33 x 135 cm
액자에서 때어낸 작품 입니다
사진을 참고 바랍니다
성재 김태석(金台錫)
김태석(1875~1953)의 호(號)는 성재(惺齋)요 본관은 경주(慶州)이다. 위창과 더불어 근대 한국 전각계의 쌍벽을 이룬 성재는 일찍이 청국(淸國)과 일본에 만유(漫遊)하며 많은 묵연(墨緣)을 맺었으며 귀국 후에는 ‘대동한묵회(大東翰墨會)’를 조직하여 전람회를 여는 등 서예와 전각을 통해 후진양성에 힘썼다.
그는 각 서체에 능했지만 특히 전서에 뛰어났으며 전각에도 전념하여 한국의 등석여(鄧石如)라는 별칭이 있다. 성재는 중국 북경(北京)을 중심으로 15년(1908~1923)동안 체류하면서 전각에 전념하여 3 만과(萬顆)에 달하는 공사인(公私印)을 각(刻)하였다고 한다. 그리고 그의 나이 38세에 되던 해인 1913년에는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(總統)이었던 원세개(袁世凱)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국무원 비서직으로 있으면서 옥새(玉璽)를 비롯한 많은 인장을 각(刻)하였다.
성재의 인예(印藝) 중 가장 특색 있는 것은 선대(先代)의 많은 전각들이 측관(側款)을 남기지 않는 반면 성재는 측관을 잘하여 남겼으니, 이는 그가 이미 청년시절부터 중국을 내왕하며 견학한 결과의 산물이다. 성재의 인흔(印痕)은 <남유인보(南遊印譜)> · <동유인보(東遊印譜)> · <성재재중전각인영집(惺齋在中篆刻印影集)> · <승사인보(乘槎印譜)> · <새인도고인집(璽印圖攷印集)> · <원세개총통사장인집(袁世凱總統私章印集)> · <중화각부현인문집(中華各府縣印文集)> · <청유인보(淸遊印譜)> · <수명루인보(水明樓印譜)> 등의 여러 인보에서 볼 수 있다.
상품의 사용후기를 적어주세요.
게시물이 없습니다
상품에 대해 궁금한 점을 해결해 드립니다.
게시물이 없습니다